기고

환율전쟁의 아픈 역사가 반복될 것인가

bondstone 2019. 7. 22. 15:31

[Wealth Management]환율전쟁의 아픈 역사가 반복될 것인가 

신동준 KB증권 자산배분전략부 상무/ 숭실대 금융경제학과 겸임교수


2012년 여름,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10년 중반부터 2012년 초까지, 대한민국은 금융위기를 가장 빠르고 모범적으로 탈출한 나라로 전세계 투자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한국기업들은 약진하며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해나갔고, 2011년 4월 KOSPI는 미국의 S&P500보다 2년이나 먼저 금융위기 이전 고점을 뚫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가장 투자하고 싶은 나라로 꼽힌 단골국가였다.


그러나 2012년 여름 이후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2012년 6월 그리스 사태 (Grexit)를 전후로 “유럽위기는 대공황 이후 최대의 충격이 될 것”이라는 당시 고위당국자들의 이례적인 발언들이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대기업들은 즉시 하반기에 계획되어 있던 고용, 투자, 구매 계획들을 취소하며 컨틴전시 플랜에 돌입했다. 그때부터 위기에 대비하여 정부는 재정흑자 기조를, 기업은 현금확보를 추구했고, 가계는 부채부담으로 소비를 줄이면서 한국경제는 멈춰 섰다. 2013년 1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컨설팅그룹 PWC의 회장은 “지난 16년간 글로벌 최고경영자 (CEO)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해왔는데, 특정국 (한국) 기업인들의 자신감이 이처럼 낮게 나온 것은 처음인 것 같다”며 흥미로운 결과라고 소개했다. 새해 기업실적 개선에 자신감을 보인 한국 기업인들은 6%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시기에 선진국들은 모두 대규모 양적완화 등 공격적인 경기부양에 나서며 우리를 추월했다. 2012년 9월 미국 연준 (Fed)과 유럽중앙은행 (ECB)은 나란히 3차 양적완화 (QE3)와 무제한 국채매입 (OMT)을 발표했고, 12월 일본중앙은행 (BOJ)은 대규모 추가 양적완화 (QQE)를 결정했다. 엔화를 시작으로 이때부터 자국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는 경쟁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소위 ‘환율전쟁’으로 확산되었다. 환율전쟁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카드를 다 써버린 주요국들이, 내수부진을 탈피하기 위해 자국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다른 나라의 내수를 빼앗아 오기 위한 경쟁이다. 2012년 7월 이후 한국은행도 1년 동안 세 차례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그러나 매번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뉘앙스를 반복하면서 상대적으로 매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2012년 상반기까지 한국경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양호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환율전쟁 이후 6년 반, 뚜렷해진 명과 암

환율전쟁이 본격화된 지 6년 반이 흘렀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달러대비 통화가치 변화율을 살펴보면 명암은 뚜렷하다. 주요 통화들에 대한 달러가치를 나타낸 달러인덱스는 같은 기간 동안 21%나 급등했다. 미국경제는 성장하는 혁신기술기업들을 다수 보유한데다 셰일혁명으로 이제는 석유마저 수출하는 국가로 탈바꿈한 영향이다. 원화 (KRW)는 6년 동안 달러 대비로는 4%가 약해졌지만, 상대가치 측면에서는 전세계의 주요 24개 통화 중에서 가장 강한 통화가 되어버렸다.


(그림1) 2013년부터 2018년까지 달러대비 통화가치 변화율

자료: Bloomberg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보면, 미국으로 수출되는 제품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국가들로 나가는 제품들의 가격은 통화가치가 벌어진 만큼 비싸졌다는 얘기다. 반도체처럼 제품 자체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어서 비싸도 팔리는 일부 품목들을 제외하면, 그동안 가격으로 경쟁하던 우리나라 다수 산업들의 경쟁력은 상당 부분 크게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장기업들의 매출성장이 2013년부터 정체되었다는 점과, 국내 주식시장에서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산업들의 시가총액 비중이 대폭 줄어들고 있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업들은 가격경쟁력 훼손을 피하기 위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한국의 내수 회복은 더뎌졌고, 그나마 한국경제를 이끌던 반도체의 슈퍼사이클이 2018년 하반기 이후 둔화되기 시작하면서 산업구조 개혁 타이밍을 놓친 한국경제의 아픈 부분이 드러나는 중이다.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2018년 4분기 이후 한국의 명목GDP가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분기별 명목성장률과 채권금리는 단기물부터 30년물까지 모두 미국보다 낮아지며 역전된 상태다. 주식시장의 부진도 깊어지고 있다. 2013년 이후 선진시장과 신흥시장 주식은 각각 80%, 25% 상승했지만, KOSPI는 5% 상승으로 제자리 걸음 중이다. 앞서 언급한 24개 주요국 중 멕시코, 말레이시아에 이어 세 번째로 부진하다.


2018년 하반기에는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되면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증시의 하락폭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화가치는 상대적으로 강했다. 한국의 펀더멘털은 둔화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원화가치는 강하게 유지되면서 한국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충격이 더 커진 셈이다. 중국 위안화 환율이 달러당 7위안을 위협하며 상승하고 (위안화 약세), 신흥시장 통화가치들이 큰 폭으로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도 달러-원 환율의 상승은 1,140원 수준에서 막혔다. 이는 불황형 흑자가 원인이었는데, 신흥시장의 불확실성 확대에도 불구하고 쌓여가는 한국의 경상흑자와 외환보유고는 한국의 신용위험을 상대적으로 낮춰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환율전쟁의 아픈 역사가 반복될 것인가

일반적으로 한국 등 신흥시장 주식은 달러가 약세일 때 강세를 보여왔다. 미국 등 글로벌 경제가 좋을 때 미국의 유동성이 기대수익률이 더 높은 신흥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원화와 신흥시장 통화가치가 강해지고 주가는 상승하는 것이 전형적인 한국증시 상승 패턴이었다. 코스피의 추세적인 상승은 늘 원화강세와 함께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은 원화강세가 별로 반갑지 않다. 한국경제가 내부적으로 성장의 동력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원화강세는 그렇잖아도 약해진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더 눌러놓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럴 때는 원화약세가 우리의 경쟁력을 자연스럽게 회복시켜 주기도 한다. 올해 들어 원화는 달러 대비 5% 약세를 보이는 등 24개 통화 중 터키 (-7%)를 제외하고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그 바람에 2019년 7월 19일까지의 통화가치 변화 순위는 태국, 대만, 스위스 다음인 4위로 밀려(?) 났다. 올해 두드러진 원화약세 덕분에 무역 가중치와 상대물가를 고려한 원화가치인 실질실효환율도 장기균형수준까지 하락하며 고평가에서 막 벗어나는 중이다. 당장의 추가 원화약세는 한국경제와 증시를 어렵게 하겠지만 길게 보면 숨통을 트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더구나 2020년 중반 경으로 예상되는 반도체 재고 사이클의 저점과 맞물린다면 내년은 기대해볼 수 있다.


(그림2) 장기균형수준에 도달한 원화의 실질실효 환율

자료: Bloomberg


마침 추세적인 달러약세나 원화강세로의 전환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감속성장에도 불구하고 여타 국가들 대비 미국의 펀더멘털 우위가 압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데다, 글로벌 경기침체에 대한 걱정은 어느 때보다 높아 달러 보유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그나마 달러약세 재료인 연준의 향후 1년 이내 세 차례의 금리인하 전망은 금융시장에 이미 다 반영되어 있다. 오히려 지금은 유로존과 영국, 일본, 그리고 한국 등 여타 신흥국들이 금리인하 또는 양적완화를 재개한다는 뉴스에 대한 반응들이 더 새롭고 강하다. 여기에 우리나라는 한일 무역분쟁이라는 새로운 부정적 변수가 더해졌다. 당분간 완만한 달러강세와 달러 대비 원화의 약세추세는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비싸더라도 위험분산 차원에서 달러와 한국채권을 더 담고 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분위기 변화는 미묘한 긴장감을 준다. 7월 중순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달러강세가 자신의 정책에 위협이 되고 있다면서 참모들에게 달러약세를 만들어낼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금융시장에서는 연준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유로존, 영국, 일본의 중앙은행도 여차하면 동반 통화완화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는 가운데, 7월 18일 한국은행도 금리를 올린 지 8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다시 1.50%로 0.25%포인트 낮췄다. 여전히 환율전쟁에 뒤쳐졌던 아픈 역사를 감안하면 그나마 긍정적인 변화다. 어렵게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뉘앙스로 일관해 환율전쟁에서 밀려났던 과거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2019.7.22
GOLD&W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