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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근린궁핍화` 환율전쟁의 역사

bondstone 2013. 1. 27. 21:36

 "다른나라 희생시켜 우리만 경기회복"
반복된 `근린궁핍화` 환율전쟁의 역사

 

◆ 新 환율전쟁 엔저의 공습 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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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호텔에 선진 5개국(G5) 경제수장이 모여들었다. 제임스 베이커 3세 미국 재무장관, 나이절 로슨 영국 재무장관,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서독 재무장관, 피에르 베레고부아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대장상. 이들은 곧 각국 환율에 펀더멘털이 잘 반영돼 있지 않은 만큼 달러를 제외한 주요 통화를 인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담은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를 발표했다.

 

1984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달콤한 달러 강세를 만끽하고 있었다. 강(强)달러 전략을 활용해 투자자를 미국으로 끌어들이고 물가도 잡았다. 미국인은 그해 해외여행 경비로 사상 최대 규모인 160억달러를 썼다. 1980년 1달러로 프랑스에서 4프랑어치밖에 쇼핑을 못했다면 그해에는 9.5프랑어치나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달러 전략은 독이었다. 1984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1000억달러를 돌파했다. 미국은 100년 만에 채무국으로 몰락했다. 곧 무역수지 적자 대상국인 일본과 독일을 타깃으로 삼아 플라자 합의를 맺었다. 당시 일본과 독일은 미국 무역수지 적자 규모에서 각각 37.2%, 9.1%를 차지했다. 플라자 합의 체결은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데 위력적이었다. 달러당 엔화값은 1985년 9월 236엔에서 1987년 12월 128엔으로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마르크화 역시 같은 기간 2.84마르크에서 1.64마르크로 폭등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수출경쟁력을 서서히 상실하면서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다.

 

역사적으로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자국 통화 절하를 유도해 이를 돌파하려고 했다. 영국 경제학자 J V 로빈슨은 이 같은 통화 절하 정책이 상대방 카드를 전부 빼앗아 온다는 뜻에서 `근린궁핍화정책(Beggar-my-neighbor)`이라고 규정했다. 자국 통화가치 절하가 수입 감소ㆍ수출 증대→무역수지 흑자→설비투자 활성화→고용 창출→경기부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통화 절하 정책은 상대국 반발을 불러 `환율전쟁(exchange rate wars)`을 유발한다. 맞불이다. 대표적인 것이 대공황 직후 나타난 블록경제 시스템이다. 블록경제는 관세전쟁에서 환율전쟁으로, 다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1929년 대공황을 맞은 미국은 이듬해 최고 500%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홀리 스무트법을 공포했다. 일본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이 이 장벽을 뚫고자 통화 절하를 단행했다. 영국은 통화 절하에 이어 1932년 7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대영제국 경제회의를 열어 영연방에 특혜관세를 부여하는 스털링블록(Sterling Block)을 창설해 맞섰다. 이 여파로 프랑스는 수출액이 1930년 30억프랑에서 1932년 15억프랑으로 반 토막 나는 충격을 받았다. 영국의 반격이 이어지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4월 자국산업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금본위제 폐기를 선언했다. 달러값은 불과 3개월 만인 그해 7월 41%나 떨어졌고 유럽 길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세계 각국이 통화 절하 유혹에 빠지는 것은 통화 절상으로는 경기부양이 힘들어 자칫하면 그 지위마저 상실할 수 있어서다.

 

환율전쟁은 국제통화체제 변곡점에서 자주 발생한다.

 

1944년 미국 주도로 세계 각국 통화를 달러 기준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내용을 담은 브레턴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출범한 이래 수십 년간 외환시장은 평온했다. 미국은 유일한 기축통화국으로 화폐주조 차익인 세뇨리지를 얻으며 번성기를 누렸다. 달러값이 비싸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하더라도 화폐를 찍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당시 로버트 트리핀 예일대 교수는 "미국이 경상적자를 허용하지 않고 국제 유동성 공급을 중단하면 세계 경제는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트리핀의 딜레마를 주장했다.

 

예언대로 1971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달러의 금 교환 요구를 견딜 수 없어 금과 달러 간 교환 정지를 선언했다. 이후 1976년 1월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에서 변동환율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킹스턴체제가 태동했다. 하지만 새 제도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일이 필요했다. 이 과도기에 국가 대 국가, 국가 대 투기세력 간 환율전쟁이 발발했다.

 

1992년 헤지펀드 제왕 조지 소로스가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하면서 각국은 잇따라 통화 방어에 나섰다. 소로스는 영국이 유럽통화제도(EMS) 산하 유럽환율조정기구(ERM)에 가입해 있었던 점을 노렸다. ERM은 환율이 급변할 때 유럽 국가들이 협동해 환율을 고정시키는 안정장치로 준고정환율제 같은 역할을 했다. 문제는 ERM에서 마르크화 비중이 30%나 달했다는 점이다. 1990년 통일 독일은 돈이 필요해지자 마르크화를 방출했다. 하지만 곧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이에 금리를 10차례나 인상했다. 영국은 환율 변동을 막고자 금리를 함께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로 실업률 상승에 시달렸다. 소로스는 이런 체제가 오래 못 갈 것으로 판단하고 100억달러 규모 파운드를 매도해 차익 10억달러를 실현했다. 영국은 150억달러를 투입해 파운드화 하락을 막으려 했지만 뒤이은 투기세력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1997년까지 이탈리아 리라화, 태국 바트화 등이 출렁였고 한국도 이 여파로 외환위기를 맞았다.

 

최근 환율전쟁 조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을 중심으로 무역적자 해소와 경기부양을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돈을 풀고 있는 결과다. 특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엔화를 무제한 찍어 경기를 살리겠다는 아베노믹스는 주변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상덕 기자 / 전범주 기자]

2013.1.26

매일경제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3&no=63536

 


日 괴롭힌 엔고 28년
장기침체 원죄 2명의 중앙銀 총재…금리정책 실패로 `버블경제` 양산
금융완화만 집중…최악 재정악화

 

◆ 新 환율전쟁 엔저의 공습 ① ◆

 

일본 경제의 역사는 `엔고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5년 9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선진 5개국 중앙은행 총재 간에 이뤄진 플라자 합의는 일본경제에 대전환점이 됐다. 이후 달러가치는 2년만에 30% 이상 급락했다. 반면 엔화가치는 1985년 2월 달러당 260엔에서 3년 만인 1987년 말 120엔대로, 1995년 중반에는 80엔까지 올랐다. 10년 만에 통화가치가 3배나 오른 셈이다. 지난해 9월에도 엔화값은 77엔을 기록했다. 결국 지난 28년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엔고`라는 자국 화폐가치 상승과 씨름해왔으나, 결과적으로 패배의 쓴맛만 보고 말았던 셈이다.

 

그동안 일본 정부의 엔고 대처는 금리를 활용한 금융완화 정책에만 중점이 맞춰졌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일본 장기침체의 원죄를 되짚을 때마다 2명의 일본 중앙은행 총재가 등장한다.

플라자 합의를 맞닥뜨린 스미타 사토시(84~89년 재임) 당시 총재는 초기에는 엔고로 인한 수출경쟁력 약화를 염려한 정치권의 압박에 굴복하고 1986년 1월 30일 정책금리를 5%에서 4.5%로 내린다. 30년에 가까운 금융완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87년 2월까지 1년 동안 7회에 걸쳐 금리를 2.5%까지 인하했지만 엔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황기와 방만하게 풀린 시중자금이 맞물리며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격의 급등만 초래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일례로 1987년 2월 119만7000엔에 상장된 일본 최대통신사 NTT 주가는 두 달 만에 318만엔으로 3배 가까이 치솟았다. 1981년부터 1991년까지 10년간 일본 6대 도시 상업용지의 평균가격은 473%나 급등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정치권, 정부, 학계 어느 쪽도 일본이 버블경제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버블경제`라는 단어가 등장한 횟수는 1987년 1회, 1988년 4회, 1989년 11회에 불과했다. 부동산과 주식의 폭락이 본격화한 1991년에 가서야 2546회로 급증했고 1992년에는 3475회까지 늘어났다.

 

스미타 총재의 뒤를 이은 미에노 야스시 총재(89~94년)는 뒤늦게 금융 긴축으로 돌아섰다. 1989년 4월에 가서야 2.5% 정책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1990년 8월까지 1년 반도 안 돼 금리는 6%까지 치솟았다. 돈줄이 조여지자 거품이 잔뜩 끼어있던 부동산과 주식가격의 폭락이 초래된 것은 물론이다.

 

이후 일본 경제는 버블붕괴의 폐허 속에서 장기간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엔화값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 기업들은 버블 붕괴의 경험 탓에 축소지향적 경영에 몰두하고 말았다. 엔고에 따른 가격경쟁력 약화를 연구개발과 신사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 등을 통해 극복하지 못하고 내수 호황의 단맛에만 빠져들고 말았다. 수출기업의 경우 엔고를 피해 해외생산기지 확대를 추진했다. 1985년 3.0%에 불과했던 일본 제조업의 해외생산 비율은 1990년 6.4%로 늘어났고, 2009년 17.8%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버블 붕괴와 함께 대규모 도산을 맞은 경험은 일본 기업들에 트라우마에 가까웠다. 투자보다는 재무구조 강화에만 치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때마침 엔고에 따른 수입물가 하락에 힘입어 내수가 호황을 거듭하던 때여서 사업다각화와 해외진출의 필요성은 더욱 감소했다. 당시 고위 재무관리를 역임한 가토 다카토시 일본국제금융정보센터 이사장은 "버블 붕괴 이후 다양한 정책 실패 중 일본 기업들이 해외로 진출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부족했던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엔고대책은 여전히 금융완화에만 집중됐다. 1998년 3월 취임한 하야미 마사루 총재 등 5년마다 일본은행 총재가 바뀔 때마다 취임 일성은 `디플레이션 탈피와 엔고 시정을 위한 금융완화`였다.

이 과정에서 2000년대에는 관료들의 자기 밥그릇 챙기기라는 병폐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엔고에 대처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중장기 산업대책을 마련하기보다 각종 규제로 기업들을 옭아매는 데 혈안이 된 것이다. 다케나카 헤이조 게이오대학 교수는 "규제를 많이 만들수록 각 부처는 관련업계에 낙하산이라는 시스템으로 퇴직자들의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닛케이비즈니스는 이로 인한 일본 경제 침체를 `관제불황`으로 표현했다.

 

최근 지난 2년여 동안 일본은행은 총 101조엔의 자산매입기금을 조성했고 이 중 70조엔 이상의 돈을 풀었다.하지만 작년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0.1% 하락을 기록했다. 4년 연속 마이너스이다. 엔고를 시정하고 경기를 회복시키겠다고 나선 일본 정부의 30년에 가까운 금융완화 역사는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한 채 국내총생산(GDP) 대비 237%라는 국가부채비율이 나타내듯 선진국 최악의 재정악화만 초래하고 말았다.

[도쿄 = 임상균 특파원]